[동춘당 (문화원형백과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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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別堂>으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자그만 팔작지붕의 기와집이고 온돌방 2칸에 대청 4칸으로 되어 있다. 나지막한 기단위에 사각으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세웠다.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댔다. 대청 앞쪽에 달린 띠살문은 여름에 활짝 들어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회덕 동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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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동춘당(懷德同春堂)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48세가 되던 해(1653년)에 지은 별당(別堂)으로 대전광역시 송촌동 동춘당 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건물은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이 세운 것을 송준길이 48세인 효종 4년(1653)에 헌 목재를 그대로 써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
건축 양식 [편집]
동춘당은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는데,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 옆면, 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머름·중방·창호의 구성이 단아하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同春堂’ 현판이 걸려 있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 |
조선후기의 문신(文臣).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동춘당 준길은 청좌공(淸坐公) 이창(爾昌)의 아들로 대덕 송촌(宋村)에 살았던 조선예학(朝鮮禮學)의 대가(大家)였다. 공은 쌍청당 송유(宋愉)의 7세손으로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동춘이 태어난 집은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옛집으로 이 집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다 탄생한 곳이니 기이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1606년(선조39년) 탄생하기 전에 이웃에 사는 벼슬아치 이덕순(李德純)이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어떤 사람이 산구(産具)를 가지고 와서 말하되 「나는 하늘사람인데, 송모(宋某)가 아들을 낳게 되어 이것을 송씨의 집에 주려 한다」고 하는 꿈을 꾸고 깨어, 사람을 보내서 물어본즉 공이 이미 탄생했다고 한다.
10세 되는 1615년(광해군7)에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의 제3자(子) 되는 우암(尤庵)을 보내와서 동학(同學)하게 되었다. 수옹(睡翁)은 청좌공(淸坐公)과 더불어 쌍청당(隻淸堂)을 동조(同祖)로 하고 또 두분이 정헌(正獻)[正獻은 시호; 아호는 崇德齋] 이윤경(李澗慶)의 외손(外孫)인고로 양이 형제(兄姨兄弟) 사이 이고 그 아들인 우암(尤庵)은 동춘(同春)보다 한살 아래이었다. 이때부터 동춘(同春)과 우암(尤庵)의 관계는 혈연으로서 뿐만 아니라 학연으로서 동학(同學)하는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16세에 1621년(광해군13년)에 관례(冠禮)를 행하시었다. 예(禮)는 사계(沙溪)가 와서 관(冠)을 씌우고 신독재(愼獨齋)가 찬(贊)을 하고 죽창(竹窓)이 빈(賓)을 했다. 인조원년(1623)에 사계(沙溪)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을 했다. 사계(沙溪)는 동춘의 표종숙(表從叔)이다. 먼저 계몽서(啓蒙書)를 수학하고 이로부터 왕래하면서 모든 글을 다 통하였다. 또 예서(禮書)에 정박(精博)하여 자기의 말로 외듯 하니 사계가 바야흐로 예(禮)를 사람에게 가르치는 지라 기뻐하여 말하기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되리라" 했다. 이해 가을에 생원진사초시(生員進士初試)에 합격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고관(考官)의 논박(論駁:잘못을 공격함)을 당하여 과거급제가 취소되고 말았다. 10월에 진주정씨(晉州鄭氏)에게 장가들었다. 배우자는 문장공(文莊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따님이시니 이때에 우복이 부제학(副提學)으로 휴가를 얻어 상주(尙州)로 돌아와 보니 왕이 혼수를 내리시었다. 우복이 동춘을 보고 원도지기(遠到之器 :그릇이 될 인물)로 크게 기대했다.
동춘이 혼인할 때의 일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경상도의 유명한 학자 우복(愚伏) 정 경세(鄭經世)가 사위감을 고르려고 사계 선생댁을 찾아왔다. 우복(愚伏)은 사계에게 사위감 하나를 골라 달라고 청하니 사계께서 하는 말씀이 서당에 가면 세 청년이 글을 읽고 있을 터이니 가서 골라보라고 권하였다. 우복이 서당으로 불시에 찾아가서 방문을 열으니 세 청년이 다같이 누워있었던 때였다. 불시에 손님이 문을 열자 누워있던 세 청년 가운데 한 청년은 얼른 일어나서 나와 인사를 하며 손님을 맞이하여 드리고, 한 청년은 누운 채 그대로 있었으며, 한 청년은 다만 일어나 앉아서 있을 따름이었다. 세 청년의 행동이다 각각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돌아온 우복은 사계에게 누워 있는 청년은 누구이며, 일어나 나와서 인사를 한 청년은 누구이고, 일어나 앉아 있던 청년은 누구냐고 물으니, 누워 있던 청년은 우암 송시열이고, 인사를 나온 청년은 초려 이유태이며, 앉아 있던 선비는 동춘당 송준길이라고 하니, 우복은 중도를 지켜 처세를 할 줄 아는 송준길을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정경세는 사위를 본 후 언젠가는 자기 사위인 송준길이 정승을 하리라고 믿고 요도 두겹으로 깔아주며 반찬도 정승을 대접하는 찬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자기의 벼슬은 판서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자기보다 벼슬이 높아질 사위감 송준길에 대해서 항상 자기보다 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부인과 함께 짜고 우암, 동춘, 초려 세 청년 중 누가 정승자격이 있는가 시험해 보고자 약속한 후 개울에 나가서 발가벗고 목욕을 하고 있는 세 청년의 의복을 가지고 도망해 오라고 하였다. 옷을 가지고 내빼는 청년을 보자 화가 벌컥 난 우암 송시열은 발가벗은 채 알몸으로 동네 안에 쫓아 들어오며 내옷 내놓으라고 고함을 치니 동네 아낙네들이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랠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옷을 가지고 도망해 오던 하인은 우암의 옷만은 돌려주었는데 초려 이유태은 모래를 파고 들어가 몸을 파묻고 옷을 갖다줄 때를 기다렸으며 동춘은 의젓하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본 우복정경세는 옷을 돌려주면서 정승재목은 뱃심좋은 우암 송시열이 틀림없으나 자기의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선비는 사위 송준길이라고 칭찬하였다. 과연 살아서 생전에 정승을 한 분은 우암 송시열이요, 동춘은 생존에 이조판서 밖에 못하였으며 사후에 영의정을 증직(贈職)받았으니 중도를 지킬 줄 아는 선비다운 모습을 선생에게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1624년(인조2년) 8월에 생원진사(生員進士) 회시(會試)에 합격하였고 다시 이듬해 여름에 별시초시(別試初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이때 우복이 시관(試官)이었는데 동춘이 합격됨을 알고 급히 시험지를 감추며 합격시키지 않았으니 사위의 등제(登第)시켰다는 혐의를 미리 피하고자 함이었다. 1628년(인조6년) 청좌공(淸坐公)이 졸(卒) 했다. 공이 16세때 1622년 (광해군14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실 때부터 이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건강을 잃는 우려가 있었는데 청좌공(淸坐公)이 졸(卒)함을 당하여 깊은 병환(病患)이 되니 뒷날 일생의 쇠약한 증세는 실로 여기에서 근거되었다. 25세되는 해인 1630년(인조8년)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 정9품 벼슬)를 제수 하였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청좌공이 돌아가신 뒤부터 드디어 과거보는 일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전후제명(前後除命)에 있어서 학문이 완숙하지 못하다고 사면(辭免)하시고 취임(就任)하지 않으신 것이다. 1631년(인조9년)에 스승이신 사계(沙溪)선생이 돌아 가셨다. 사계선생은 돌아가기 이전에 동춘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이르시길 미고(微羔)가 있다하며 동춘이 우암과 더불어 연산(連山)으로 오라고 하였다. 동춘이 우암과 함께 연산으로 황급히 가보니 사계의 병환은 이미 위급하였던 것이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가마기복(加麻期服 : 잔을 쓰고 일년동안 服을 입음)을 하시어 스승 사계에 대한 예우를 다하였다. 1632년(인조10년) 겨울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1633년(인조11년) 5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除授)하니 동춘이 누차 사양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시며 마지못하여 취임하시었다. 동몽교관은 각 군현에 설치된 것으로 이전의 동몽훈도(童蒙訓導)에서 명칭이 바뀐 것이며 아이들을 교육하고 향촌사회의 윤리교화와 지방사회 사족(士族)의 구심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리이다. 1635년(인조13년) 봄에 의사에게 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장차 상행(上行)하려 할때 우암이 육효(六爻)를 뽑으니 규지진괘(暌之晉卦)가 나왔다. 이때에 동춘이 숙환(宿患)이 심극하여 의원들이 각견(脚緊)을 풀어 기혈(氣血)로 하여금 통하게 하기를 청했으나 동춘이 썩 마음내켜 풀지 않으며 말하길 "이같이 한 즉 산만(散漫)하여 어지러우니 도리어 병이 더한 것 같다고 하시었다. 우암(尤庵)이 동춘의 수속검지공(收束檢之功 :머리를 빗고 망건을 쓰고 행전을 매고 의복을 단정히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바라고 항상 감탄하였더니 이 경우에도 몸의 단정함이 흐트러지는 것이 몸의 병환을 치료하는 것보다 높이 생각했다. 동춘의 지조 높은 학자로의 자세가 여실히 드러난다. 건강과 연결되어서 그런것인지 아니며 다른 도학적 지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동춘의 건강의 위약함은 이후 동춘의 관계 진출이 간접적인 영향이 있지 않나 싶다. 1636년(인조14년)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제수했고 바로 예산혐감(禮山縣監)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으셨다. 1643년(인조21년) 정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했으나 사양하였고, 7월에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으셨다. 1644년(인조22년) 11월에 지평(持平)을 제수했으나 역시 부임치 않았다. 이때 우암은 사헌부사간원(司憲府司諫院)니 대직(臺職)에 임명되어 나가있었다. 1645년(인조23년) 4월에 또 지평(持平)을 제수 했는데 상소하여 사양했다. 이것이 진정사직겸진소회소(陳情辭職兼陳所懷疏 : 仁廟 乙酉 五月時 昭顯世子新蒙)인데 여기에 선생이 관직을 사양하게 되는 이유를 어린시절에 과거 공부를 했으나 재주가 둔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이 들어 병에 걸려 백방으로 치료했으나 효과가 없어 생긴 몰골이 파리하고 원기가 없어서라고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학문에 대한 겸손의 뜻이겠으나 후자의 경우는 스스로의 건강에 대한 모자람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1649년(효종즉위) 5월에 인조가 돌아가고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빈청(賓廳 : 대신과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임금을 만나서 모여서 회의하는 곳) 관리들이 아뢰어 신독재·동춘·우암을 독서지인(讀書之人)으로 천거하니 효종은 흔쾌히 응하였다. 6월에 부사직(副司直)을 제수받고, 6월 시강원 진선(侍講院 進善)을 제수받고, 8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제수받고 9월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로 승직(陞職)되었으며 10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었다. 동춘은 효종이 즉위하면서 당시에 권세를 휘두르고 청나라에 아부하던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을 탄핵하여 그 시비를 가리어 청서파(淸西派)의 집권을 가져오게 하니 세인(世人)의 칭찬이 높았다. 그후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은총이 지극하여 북벌계획(北伐計劃)에 깊이 참여했다.
공은 농민들에게 평상시는 농기구로서 소시랑을 쓰게하고 일단 유사시는 소시랑 끝을 뻗쳐서 창으로 이용하게 하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며 국민들에게 파란 이불호청과 빨간 이불호청을 쓰게 한 다음 유사시에는 이불 호청을 뜯어서 군복을 만들어 쓸 수 있도록 유념하였다고 전한다. 일찍이 송시열은 그를 가르켜 「천품이 뛰어나고 정명온수(精明溫粹)하며 머리가 총명하고 하자가 없는 옥같은 선비이며, 색이기화(얼굴빛이 온화하고 성품이 온화함)하여 보는 사람마다 심취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그의 학문은 사계 김장생을 잇고 있지만 예학에 있어서는 오히려 사계 자기 자신보다 앞서 있다고 하여 칭찬을 하였다고 한다. 1659년(현종 즉위년) 그의 나이 54세 때 다시 이조참의에 나아간 그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 우암과 함께 기년제(朞年制)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남인(南人) 윤휴, 윤선도(尹善道)의 3년제(三年制)를 누르고 예송에 승리함에 따라 우참찬(奈參贊)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윤선도에 의해 재론된 예송으로 속죄(續罪)키 위하여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4월 조경(趙絅)이 다시 소를 올려 송준길을 심히 탄핵하자 그는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1665년 원자(元子)의 보양(輔養)문제를 상소하여 첫번째 보양관(輔養官)이 되고 현종에게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올려 더욱 더 세인(世人)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기년제(朞年制)의 잘못으로 남인(南人)들의 규탄과 거듭되는 상소로 사퇴했다. 뒤에 벼슬은 좌참찬(左參養) 겸 좨주(祭酒),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1670년(현종 11) 세자(世子)의 관례가 있어 조정에 나아갔는데 때마침 전라감사 김징(金澄)에 대한 무고가 있어서 그는 또 한 차례의 무고를 받았다. 그러나 동춘당은 세자의 관례에 끝까지 참여한 후 곧 한강(漢江)을 건넜다. 이에 임금과 세자가 몇번이나 유지[諭旨]를 내려 조정에 머물기를 간청했으므로 마지못해 승락했다가 다시 몇번이나 낙향할 것을 간청했다. 마침내 허락을 얻어 하향(下鄕)하여 67세에 조용히 영면했다. 동춘당은 송시열과 같은 학통(學統)의 성리학자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랐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1756년(영조32)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공주(公州)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옥천(沃川)의 표충사(表忠祠),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등에 제향(祭享)되었다. 공은 명필이어서 이시발신도비(李時發神道碑)를 비롯하여 윤계순절비(尹啓殉節碑), 박팽년 유허비(朴彭年遺虛碑)등 우암의 비문에 동춘당의 비문글씨로 된 금석문(金石文)이 대덕구를 중심으로 많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동춘당집《同春堂集》·어록해《語錄解》등이 있다. 《崔槿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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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송준길
(15) 조선중기 -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
글 :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송시열 초상화
가을을 조락의 계절이라 했지만
올해는 유독 주위의 큰 어르신들이 세상을 버렸다.
시속에 따라 각종 예법이 바뀌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조문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고인을 생각할 겨를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냉정하고 주위 분위기도 빠르고 편리해져 간다는 것이다.
소시적 꽃상여를 붙들고 산 넘고 물 건너 통곡하며 뒤따르던 상주들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기억 속의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한 망자의 생각은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형식이 정신을 담아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예를 차리지 못한 것 같아 갈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시속을 근 3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암·동춘당- 미수와의 예송 논쟁
조선의 글씨가 당색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우암 송시열(1607~89)과 동춘당 송준길(1606~72)을 논하면서 뺄 수 없는 것은
미수 허목과의 예송(禮訟)논쟁이다.
즉 1659년 효종의 급사와 1674년 인선왕후 별세 때의 복상(服喪)문제로
야기된 2차례의 논쟁이 그것이다.
요컨대 남인의 영수인 미수는 3년설을 주장하였고,
서인(노론)의 영수 우암과 동춘당은 기년설(朞年說·1년)을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왕실 예법에 대한 철학적 배경차이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반인과 다른 특수성이 반영된 미수의 고전예학(古典禮學)과
보편적인 우암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그것이다.
결국 이것은 16세기 말부터 조선정치사 골격은
당쟁사라고 할 정도로 사림정치가 크게 변질되어
노론(老論)일당 전제와 세도정치로 나아가게 한 요인이 되었지만
글씨에서도 당시 남인과 서인은 서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미수는
88년 평생 삼대고전(三代古篆)의 재해석으로 일관하였고,
우암과 동춘당은 이이에서 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서인의 적통으로서 한석봉체를 토대로 안진경체를 가미한 소위 양송체(兩宋體·그림 1)를
구사하였던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양송체는 서인 세력의 인조반정 성공 후 17세기 진경시대를 풍미하게 되었고,
윤순과 이광사를 통해 완성되는 소위 동국진체의 한 가지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림1. 송시열,‘주자명언(朱子名言)’, 십곡병풍 중 부분, 지본, 139×52cm,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주희(朱熹)의 글을 송시열이 썼다.
天地生萬物, 聖人應萬事, 惟一直字而已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일직’(一直)이란 글자일 뿐이다
글씨는 심획(心劃)이다
송시열이 ‘刻苦’를 쓰고 제자인 유명뢰(兪命賚),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가
‘각고’를 주제로 학문과 공부에 대한 자기 생각으로 발문을 달았다.
글씨에 대한 미학적 입장 또한
동춘당과 우암은 창고(蒼古)함을 추구한 미수와는 뚜렷이 차이가 난다.
즉 동춘당과 우암은 글씨를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간주하면서
기교가 아니라 마음수련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글씨를 도학(道學)연마의 연장으로 보는 이황이나 이이 등과 같은 입장이다.
실제 우암은 이황의 서첩을 보고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
하고 감탄하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글씨에 대한 인식은
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자의 서예관과 궤를 같이한다.
즉 주자는 글씨를 쓰는데 있어 제일 먼저 뜻을 바르게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뜻이 바르지 않으면 글씨가 거칠어지게 되고,
글씨의 아름다움만 추구하게 되면 이로 인해 글씨에 미혹해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우암이 되살아 나온 ‘刻苦(각고)’라는 대자서
그러면 글씨를 심성수양으로 간주한 우암과 동춘당의 작품은 어떠하였을까.
우선 대자서로 쓴 ‘刻苦’(각고·그림 2)를 보자.

그림2. 송시열,‘각고(刻苦)’, 지본, 164×82cm, 개인 소장.
이 작품은 제자 유명뢰가
‘刻苦’라는 두 글자를 공부하는 자로서
제일 먼저 마음에 새기려 글을 청하자 우암이 써준 것이다.
‘글씨는 그 사람이다’ 라는 도학자들의 글씨에 대한 명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해행으로 구사된 장중한 필획, 확고부동한 안정된 짜임새에 절의에 찬
우암의 성정과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특히 장지바닥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필의(筆意)가 글씨의 생동감을
극대화하는 지점에서는 우암을 생면(生面)하는 감흥까지 자아낸다.
더욱이 ‘느긋하게 되는 대로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
배우는 자의 가장 큰 병통이다.
만약 이러한 병통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비록 높은 재주와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다 해도 결단코 성취할 가망은 없는 것이다.
刻苦라는 두 글자가 어찌 이러한 병통에 꼭 맞는 훌륭한 처방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는 우암의 제자 권상하의 발문을 보면
글씨 자체가 곧 선생님이 되어 목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글씨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발견하게 되는데,
서예가 단순한 기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정신이 투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도 굽힐 수 없는 절의정신
그렇다면 우암의 절의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 단면을 우선 ‘송자대전’에서 보자.
김수항이 요동에서 얻어온 숭정황제 어필 ‘非禮不動 (비례부동)’을
간행하여 보내준 데 대해 우암이 손 모아 절하고 발문을 달았다.

송시열 초상화
‘…
문정공(청음 김상헌)은 한 몸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부둥켜 세워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므로 오랑캐들도 공경하여
복종하고 존경하고 사모하게 하였으니 어필을 간행한 뜻이 남달리 돈독하다
…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어필에 대한 의인화된 태도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효종과 독대로 북벌(北伐)을 통해
청을 도모하고자 한 '우암'으로서 당연하다.
이러한 우암의 정신은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의리론(義理論)을 전수받으면서부터 배태되었고,
후에는 이와 같이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정통론으로 천명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암이나 동춘당의 글씨가 중요한 것은
그 조형적인 특질이나 후대 영향력으로 차지하는
'조선중기 서예사에서의 비중' 도 비중이지만
사약을 받아 죽을지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절의정신' 이 글씨 속에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고
마침 올해가 동춘당 탄생 400주년이고, 내년이 우암의 400주년이 되는 해이니만큼
두 분이 400년 만에 이 땅에 다시 온 뜻을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되새겨 실천해 볼 일이다.
[동춘당문집]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서예가 열전](15) 조선중기 -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작성자 동성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송준길(宋浚吉 : 1606~72)의 시문집.
48권 26책(본집 28권 14책, 별집 8권 4책, 속집 12권 8책). 목판본. 1680년(숙종 6) 왕명에 의해 송시열이 교열해 예문관에서 간행했고 1768년(영조 44)에 그의 현손 명흠(明欽)이 추초(追抄)해 중간(重刊)했다. 속집은 1910년(융희 4)에 출간한 것으로, 1847년(헌종 13)에 추편했던 습유(拾遺) 8권 4책을 다시 산정(刪定)하고 남은 유고 초본(草本)을 정리해서 원집과 합해 간행했다.
소(疏)와 차(箚)는 대부분이 사직(辭職)에 관련되어 있으나 예제(禮制)에 관한 이론이나 당쟁에 관한 자료도 많이 모아놓고 있다. 그중 〈사대사헌겸진소회차 辭大司憲兼陳所懷箚〉·〈승명논허목상복소차 承命論許穆喪服疏箚〉 등은 1659년(효종 10)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논란이 많이 일어났던 기해복제론(己亥服制論)에 관계된 예론이다. 효종이 죽자 그의 모후 조대비(趙大妃) 복상문제로 노론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와의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을 때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에 동조해 윤휴·윤선도의 삼년설(三年說)을 논박했다. 이에 관련된 예론은 당시 당쟁연구에 매우 필요한 자료이다. 그밖에 〈국휼시백관복제의 國恤時百官服制議〉·〈능호혐피의 陵號嫌避議〉 등의 헌의는 임진왜란 이후 예제(禮制)의 문란을 정비하려는 저자의 노력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논시사차 論時事箚〉·〈사헌직겸논군덕소 辭憲職兼論君德疏〉 등은 노론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해 임금에게 올린 당시의 시무책의 하나이다. 〈진정소 陳情疏〉·〈진사겸사직명소 陳謝兼辭職名疏〉 등은 30년간 임금의 명을 받고도 의리에 맞지 않으면 벼슬에 나가지 않아 일생 동안 조정에 머문 날은 단 1년에 불과했던 저자의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서(書)의 내용은 경전·성리설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이 있는데 역시 주로 예설에 관한 문답이 많다.
특히 스승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해 당대에 유명한 유학자들과 주고받은 서신들은 제문(祭文)이나 잡저 등과 더불어 사승관계와 교우관계의 폭을 짐작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학문적 경향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책은 전례(典禮)에 관한 논술이 많으며 특히 효종의 복상문제에 대한 문헌으로서 당시의 예송과 당쟁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